시시한 약자를 위해 무시무시한 악과 싸우는 페미니즘

http://gajjgajifemi.blogspot.com/2018/07/blog-post.html?m=1 '무엇이 렏펨을 악하게 만드는가' 에 대한 반박글이기도 하다.

1. 
웹툰 <송곳>에서 노동운동가 선배 구고신은 이런 대사를 한다. "우리는 악한 강자와 싸우는 선한 약자가 아니오.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오." 나는 활동이 힘들 때 종종 이 말을 생각하지만, 동시에 이 말이 얼마나 해체주의적이고 몰계급적인지 또한 생각한다. 과연 우리를 억압하는 것은 시시한 강자들인가. 이 제도가, 체제가, 경제 구조와 이데올로기가 그렇게 시시한가. 그 구조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그렇게 시시한가. 그렇게 시시하다면 왜 노동자들은 몇백년째 착취받고 있으며 여성에 대한 억압은 이렇게나 체계적이고 자연에 대한 약탈은 왜 그 많은 투쟁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가.

 스스로 '랟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강한 악/약한 선' 구도를 가져와 자신들은 권력을 추구하기 때문에 악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글을 보았다. 예시로 든 '위안부' 투쟁 등의 사실관계조차 잘못되었다는 것을 차치하고, 이 글에서는 그 구도가 얼마나 기만적인지 생각해보려고 한다. 글쓴이는 니체를 인용하면서 냄져 글 인용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는데, 나는 그에 상응해 여성 시인과 사상가들만 인용해 글을 써보려고 한다. 물론 최규석 작가는 '냄져'지만, 비판적으로 인용한 것이니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온몸에 얼음이 박힌 채 살아온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해
 빈 그릇에 담기는 어혈의 투명한 슬픔에 대해
 세상을 유지하는 노동하는 몸과 탐욕한 자본의 폭력에 대해
 마음의 오목하게 들어간 망명지에 대해 골몰하는 시간
 -김선우,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중 일부

 위의 시는 여자인 김선우 시인이 마찬가지로 여자인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진숙의 농성을 보고 쓴 시이다. 2010년 한진중공은 경영 악화를 이유로 생산직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많은 노동자들이 이에 저항해 농성을 하고 심지어 목숨을 버렸다. 그 때 한진중공업에 연대하러 갔던 여성 사회주의 활동가의 회고를 기억한다. "앞에 있는 경찰도 무서웠는데, 제가 물러서는 게 더 무서워서 물러설 수 없었어요."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진심이 담긴 눈빛과, 아마도 그 경험이 바꾸었을 그녀의 삶을 안다. 세상의 거대한 악이 너무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도 손에 나무막대 하나 쥐고라도 그 악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그 마음을 안다. 

 세상에 선/악이 있고 강한 것/약한 것이 있다면 경우의 수는 네 개일 것이다. 강한 선, 약한 선, 강한 악, 약한 악. 사람들은 약한 선과 강한 악을 생각하는 것은 어려워하지 않는다. 히틀러의 파시즘과 같은 것이 강한 악일 것이고, 전쟁 중에 총에 맞아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소년 독립군이 약한 선일 것이다. 그렇다면 약한 악과 강한 선은 무엇인가? 원글에서는 '권력을 가진 것'이 강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권력을 가진 선은 무엇인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 신봉자들도 자신이 권력을 가진 선이라고 생각할 것 같긴 하다. 그들은 자신이 서구에 의해 변질된 이슬람의 최후 수호자라고 생각하니까. 그렇다면 약한 악은 강한 악이 지배하는 시대를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르게 되는 악행이 아닐까 싶다. 악의 평범성과 같은.

 대학교 4학년 올라가던 겨울, '보통의 대학생들처럼 평범하게 쉬고 아르바이트 하는 방학 보내보고 싶다'고 아무것도 맡지 않았던 그 연말연시를 기억한다. 하루종일 핸드폰 게임만 하다가 당시 사귀던 애인과 연락을 하고, 만나고, 집에 와서 또 게임을 하다가 책을 조금 읽고 하는 삶이었다. 그 날은 유독 <소금꽃나무>가 눈에 밟혔고 그 책을 꺼내 읽었다. 그리고 울었다. 통곡을 하면서 울었다. '세상을 유지하는 노동하는 몸과 탐욕한 자본의 폭력'이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 책을 읽으면서 다시는 도망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세상을 바꾸어야겠다고, 더이상 김진숙 지도위원같은 사람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세상 만들겠다고. 사람이 이렇게 죽어나가서는 안된다고. 울면서 일기를 썼다. 몇 달 뒤에 그 때를 복기하면서 쓴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역시 운동 안 하는 나는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 나는 언제든 어떤 방식으로든 운동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 (...) 나는 이 세계가 지속되는 이상 결코 올바르게 이해받지 못하게 된다. 내가 나로 살기 위해서 이 세상이 뒤집어져야 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몇백일동안 고공농성을 했던 김진숙 지도위원은 강한 선인가 약한 선인가. 그녀가 강한 선이었다면 다면 동지들이 그렇게 죽어나가는데 보고만 있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약한 선인가. 하지만 몇백일동안 고공농성을 진행했던 최초의 여성 용접공을 약하다고 말해도 괜찮은가.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소금꽃나무>에 여성혐오적인 문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약한 악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그녀의 동지들을 죽인 '탐욕한 자본의 폭력'과 근본적으로 같은 결인가. 애초에 약함과 강함, 선과 악을 결부시키는 것은 옳은 결합일까. 오히려 그것이 우리의 논의를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3.
 "동지여! 자매여! 자본주의 국가들의 세계 쟁탈전으로 말미암은 이 끔찍한 전쟁[제 1차 세계대전]에 항의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교전국은 물론 중립국에서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 우리는 타국을 비난하고 업신여기거나 무력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키는 것보다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 조국에 훨씬 이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남성들이 총을 들고 싸울 때 생명의 보존을 위해 투쟁하고 남성들이 침묵할 때 소리 높여 이상을 외치는 것이 우리 여성들의 임무다."
 -클라라 체트킨, <모든 나라의 여성 사회주의자들에게>. 책갈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 2015

 1, 2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기의 사회주의자들만큼 권력을 손에 쥐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또 있을까. 그들은 절실했고 절박했다. 그들이 권력을 잡지 못하면 수많은 남녀 노동자가 죽는 일상이 얼마나 더 이어질지 몰랐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클라라 체트킨 등의 글을 읽다 보면 그녀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그 절박한 목소리. 그들은 누구보다 권력을 원했다. 패배주의적 낭만에 빠져 있기에는 현실이 너무나 시궁창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 때 그녀들이 선택한 전략은 '내가 힘들다', '내가 약자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힘을 최대한 활용하자. 가족과 친구부터 광범한 대중에 이르기까지 말과 행동으로 영향을 미치려 노력하자. 글이든 말이든 모든 수단을 다 이용하자. 다른 나라에서도 활용할 수 있게 개인과 단체를 모두 이용하자'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위의 인용과 같은 글에 나오는 체트킨의 말이다. 다시 말하건데, 가장 가까운 시대에 사회 구조를 바꾸는 데 성공한 사람들은 도덕을 버리고 자신이 약자라는 것을 호소한 사람들이 아니라 강력한 동기를 지니고 구조를 새로 짜기 위해 싸운 사람들이었다.


4.
 페미니즘이든 사회주의이든, 그것은 약자의 투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해방의 단초가 되기 때문에 옳다. 강/약이나 선/악과 같은 문제로 따질 것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해방에 복무할 수 있느냐이다. 사회주의가 옳은 방향의 운동인 이유는 노동계급의 해방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해방된 다음 단계의 세계로 이행하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옳은 운동이라면, 페미니즘이 가부장제에서 억압받는 대다수 인간의 해방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옳은 방향의 운동이 약해 보이는 이유는 구조는 거대하고 그에 비해 운동은 작게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작은 균열이 세계를 부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몰역사적 존재들이 '구조에 희생되는 약한 나'를 연민하면서 개인화된 운동에 몰두하고, 결국 세계를 바꾸지 못하고 운동을 포기하거나 낡은 세계와 타협하게 된다. 세계를 부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개인의 권력 지향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의 운동과 두려움을 이기고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해 구조 속에서 착취당하고 희생당하는 불쌍한 나, 구조 속에서 착취당하는 형제자매들을 보고 슬퍼하는 불쌍한 나를 연민하면서 망가지는 사람들을 아주 많이 보았다. 굳이 페미니스트들 뿐만이 아니라도.


5. 
 정말 구고신의 말대로 우리는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가. 개별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들 때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와 똑같이 시시한 약자를 위해 무시무시하고 악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을, 노동자를, 제3세계를, 또 이 자리에서 다 쓸 수 없는 수많은 존재를 착취하는 이 구조와 경제와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여기에서 약한 선과 약한 악을 따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 앞에 이렇게 거대한 악이 있는데. 약한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약함을 벗어버리고 있는 힘껏 거대한 악과 싸울 수 있게 하고, 약한 악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왜 악한지 깨닫게 하고 마찬가지로 그에게 악한 행동을 강요하는 거대한 악과 싸울 수 있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남성 철학자만 인용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개인이 나빠서가 아니라 여성 사상가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해 온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구조를 깨고 여성 사상가들을 물 위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남성 철학자 인용해서 죄송하다, 사실 나도 암캐라고 말한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6.
 그리하여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는 아직 완벽하지 않은 우리와 같은 처지의 피억압자를 패기보다는 구조를 패야 한다. 권력에의 지향이란 구조를 새로 짤 힘을 원한다는 것 외의 아무 의미도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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